"세가지 질문, 세가지 반란" 왜 한국 기자들은 끝까지 질문하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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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가지 질문, 세가지 반란" 왜 한국 기자들은 끝까지 질문하지 못했을까?
  • 이효은 기자
  • 승인 2017.06.02 20: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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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연 아주대 총장의 책 <있는 자리 흩트리기>에서

[위즈뉴스] "세 가지 질문, 세 가지 반란"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로 지명된 김동연 아주대학교 총장은 그의 입지전적 삶이 알려지면서 대중들의 관심을 끌었다.

김 총장은 11살의 나이에 소년 가장이 되어, 청계천 무허가 판잣집과 천막촌을 전전하며 주경야독 끝에 행정고시와 사법고시에 합격해, 훗날 예산실장을 거쳐 장관급인 국무조정실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김 총장은 자신의 책 <있는 자리 흩트리기>에서 '기구했던' 자신의 인생드라마를 진솔하게 서술하면서, 젊은이들에게 '세가지 질문, 세가지 반란'이라는 말로 질문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그에게 질문은 왜 그렇게 중요했던 걸까.

세 가지 질문, 세 가지 반란

다음은 그의 저서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2010년 11월 서울에서 20개국 정상이 모이는 G-20 정상회의가 있었다. 건국 이래 우리나라에서 선진국 정상이 이렇게 많이 모인 적은 없었다. 우리 국격을 한층 높인 행사였다.

회의 마지막 날 오바마 대통령이 내외신 기자회견을 가졌다. 기자들의 질문 경쟁이 벌어졌다.

질문에 답변하던 오바마 대통령이 기자회견 말미에 예상하지 못한 발언을 하나 했다.

"이렇게 훌륭하게 행사를 주관한 한국에 고맙다는 뜻으로 마지막 질문권은 한국기자에게 주겠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놀랍게도 질문하겠다고 나서는 한국기자가 아무도 없었다.

다소 당황한 오바마 대통령은 언어 문제라고 생각했는지 통역이 준비되어 있다고 친절하게 부연 설명까지 해주었다.

왜 한국기자들은 끝까지 질문하지 못했을까

김동연 지음, 쌤앤파커스 출간 / 사진=예스24

그럼에도 아무도 나서서 질문하지 않는 어색한 상황이 전개됐다. 그때 한 중국 기자가 일어나 한국기자가 질문하지 않으니 아시아권을 대표해서 자기가 질문하겠다고 나섰다.

오바마는 거듭 한국기자에게 질문권을 주겠다며 "(한국기자) 누구 없나요?"하고 여러 번 물어보았다. 나서는 한국기자는 한 명도 없었고 결국 질문권은 중국기자에게 넘어갔다.

이 장면은 EBS '왜 우리는 대학에 가는가'라는 특집 프로그램의 5부 '말문을 터라' 편에 그대로 방영되었기 때문에 아마 많은 분들이 보셨으리라 생각된다.

이 프로그램에서 오바마 기자회견 내용 뒤에는 국내 몇몇 대학 강의실 장면이 나왔다.

희한하게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강의마다 교수가 "질문 있으면 하세요"라고 했지만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눈을 내리깔고 교수와의 눈맞춤을 피했다.

우리는 왜 질문하지 않는 것일까? 

질문하는 것이 직업인 기자조차 왜 오바마에게 질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서 손을 들지 않았을까?

"요즘 학생들은 질문을 하지 않는다"

대학에 와서 만난 교수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다.

왜 우리 젊은이들은 질문하지 않는 것일까?

우리 사회가 정해진 트랙 위에 젊은이들을 올려놓기 때문일까?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같은 그 트랙 위에 일단 올라서면 질문을 던지는 대신 그저 정해진 길을 가야 하기 때문일까?

질문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우리가 깨뜨려야 할 세 개의 감옥,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란 감옥, 나 자신의 틀이라는 감옥, 그리고 사회를 움직이는 게임의 룰이라는 감옥에서 우리는 영영 나올 수 없다.

<질문의 7가지 힘(The 7 Powers of Question)>이란 책을 쓴 도로시 리즈(Dorothy Leeds)는 질문이 갖는 첫 번째 힘은 질문을 해야 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질문은 생각을 자극하고 우리를 고민하게 한다. 질문을 위한 그 고민과 회의야말로 젊은 시절 꼭 거쳐야 할 소중한 과정이다.

톨스토이는 여러 작품을 통해 독자들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게 한 작가다.

<전쟁과 평화>나 <부활>, <안나 카레니나> 같은 대작 말고도 주옥같은 단편소설들을 통해 인생의 깊이와 추구 해야 할 가치에 대해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흥미롭게도 작품 속에서 종종 세 개의 질문을 던지곤 한다.

톨스토이가 던지는 세 가지 질문 

1881년 작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는 벌을 받아 세상에 내려온 천사 미카엘을 통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다.

사람에게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무엇이 주어지지 않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재미있게도 첫 번째와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같다. 사람에게는 '사랑'이 있고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아는 힘'이 주어지지 않는다. 저마다 자신마다 무엇이 필요한 지 신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작품 속에서 거만한 귀족은 조금 뒤 자기가 죽을지도 모르고 비싼 가죽을 가져와 잘못 만들면 잡아가겠다고 거드름을 피면서 구두를 만들라고 한다.

심지어 <세 가지 질문>이란 단편도 있다.

이 작품에서 톨스토이는 주인공인 왕을 통해 더 직접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언제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인생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수많은 신하와 학자들이 답을 제시하지만 왕은 만족하지 못하고 직접 세상에 나가 답을 얻는다.

답은 이렇다.

바로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왜냐하면 '지금'이 우리가 유일하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에게 '선과 사랑을 베푸는 것'인데, 이것이 사람이 세상에 내려온 이유이기 때문이다.

개미여왕의 세 가지 질문

베르베르도 <개미>에서 개미여왕을 통해 비슷한 세 개의 질문을 던진다.

가장 중요한 순간, 가장 중요한 일, 행복의 비결에 대한 것이다.

연방의 모든 개미들과 토론하고도 답을 찾지 못한 여왕은 직접 답을 찾기 위해 도시를 떠난다.

톨스토이의 <세 가지 질문>이나 베르베르의 <개미>에서 나온 답보다 더욱 내 관심을 끈 것은 주인공들이 답을 찾는 과정이다.

주인공인 천사 미카엘과 왕 그리고 개미여왕은 자신이 갖고 있는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 나선다.

누구도 그들이 갖고 있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주지 않는다.

<세 가지 질문>의 주인공인 왕은 왕궁에서 나가 고초를 겪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마음에 들지 않는 환경, 살면서 형성된 나 자신의 틀,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회를 움직이는 게임의 룰을 바꿔보자는 시도다.

세 가지 질문과 세 가지 반란

세 가지 질문은 '세 가지 반란'으로 이어진다.

남이 낸 문제를 푸는 것은 환경을 뒤집는 '환경에 대한 반란'이다.

내게 던지는 질문은 나 자신의 틀을 깨기 위한 '자신에 대한 반란'이다.

마지막으로 세상이 던지는 질문은 우리 사회를 건전하게 발전시키기 위해 사회를 변화시키는 '사회에 대한 반란'이다.

이 모든 것들을 한 귀로 꿰는 공통점은 바로 자신이 '있는 자리 흩트리기'이다.

있는 자리 흩트리기 

젊은 시절 나는 세상이 너무 싫어 뒤집고 싶었다.

우선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게 주어진 길이 너무나 싫었다. 어려운 환경이 나를 질식시켰고 세상이 너무도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남들보다 한참 뒤떨어진 출발선에서 스타트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둘러싼 그런 현실에 반란을 일으키고 싶었다.

주어진 환경을 뒤집기 위한 몸부림을 치면서 내 자신의 틀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형성된 내 자신의 틀을 깨야 한다는 절박감이었다.

남이나 주위에서 했으면 하는 일을 내가 하고 싶은 일로 착각하고 살아온 나 자신에 대한 반란이었다.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싶었고, 이를 위해 그때까지 쌓아왔던 익숙한 것들과의 고통스러운 결별을 시도했다.

환경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다 보면 반드시 부딪히는 단계가 '자기 자신의 틀'에 대한 회의다. 이 틀을 깨는 반란을 일으키고 싶었다.

그러면서 내가 몸담은 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해서도 눈을 뜨게 됐다.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부딪히는 한계, 넘지 못하는 벽 같은 구조적인 문제가 우리 사회 여기저기 존재하는 것을 알게 됐다.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게임의 룰이 때때로 온당하지 못하다는 것도 깨닫게 됐다.

사회에 대한 반란을 생각하게 됐다.

구성원 개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개선하지 않으면 사회 전체적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루기 어렵다. 우선 내가 있는 위치에서 작지만 사회변화를 위해 할 일들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신이 사람을 단련시키는 방법

신이 사람을 단련시키고 키우는 가장 전형적인 방법은 그 사람이 '있는 자리'를 흩트리는 것이라고 한다.

'있는 자리'란 바로 내가 처한 환경, 나 자신 그리고 내가 사는 세상이다. 증거는 차고 넘친다. 생각나는 위인 누구라도 이름을 대보라.

자기 자리를 흩트리지 않고 그 반열에 오른 사람이 있는지, 편안하고 안전한 길만 걸은 사람이 있는지.

가끔은 안전지대 안에서 잘되는 사람이나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성취가 오랫동안 공고하게 가는 경우는 많지 않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이나 운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기 자리를 흩트리는 사람들도 있다. 편한 자리를 마다하고 안전지대를 거부하는 것이다.

있는 자리를 흩트려야 한다. 

자신의 자리가 빈약할 때 그것은 결핍이 아니라 단련의 기회다.

있는 자리가 안전하고 여유로워졌을 때는 일부러라도 그 자리를 흩트려야 한다.

'있는 자리 흩트리기'는 인생의 오르막길을 오를 때는 용기를, 자리가 공고해졌거나 정점에 올랐을 때는 스스로 경계하는 지혜를 줄 것이다.

나이가 적든 많든, 여자든 남자든, 가난하든 부자든, 관점을 역지사지하고 다른 이의 마음을 헤아리는 통찰을 줄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한 발 더 나아가게끔 하는 길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의 고민은 축복이다. 

청년의 때가 지나서 자신의 틀이 굳어진 뒤라면 틀을 깰 기회조차 갖지 못하거나, 고민을 하더라도 깨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인생의 그 오르막길에서 고민과 실패, 그리고 좌절을 겪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청춘만이 갖는 특권이다.

축복은 대부분의 경우 다양한 형태의 힘든 모습으로 찾아온다.

지금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고 출구 없는 깜깜한 동굴 속에 갇힌 기분이 들 수도 있다. 그래도 기어서라도 나와야 한다.

언젠가 지금의 내가 이십대 초반의 나를 만난다면 젊은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겠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내 인생에서 암흑기가 있다면 십대에서 이십대 중반에 걸친, 바로 남들이 청춘이라고 부르는 그 시절이다.

한줄기 빛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터널 속에 있는 것처럼 미래에 대한 아무런 희망이 없던 시절, 그때의 좌절과 패배의식, 열등감 그리고 어깨에 놓인 너무도 무거웠던 짐 때문에 더할 수 없이 힘들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라면 감상적인 추억을 빼고는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이다.

그러나 그때의 나를 지금의 내가 만난다면 내가 해줄 말은 이렇다.

"괜찮아. 누가 뭐래도 인생은 정말 아름다운 것이야. 힘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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